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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민주주의, 변혁적 정의의 마음들
글쓴이 주윤정 / 등록일 2025-01-14
12월 3일 계엄 선포 이후,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망령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민주화 이후, 국가가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산산이 조각났다. 민주화로 어렵사리 만들어진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관들이 무력화되거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이용되고 있으며, 국가폭력의 상징인 백골단이 국회에 등장하는 참담한 상황마저 벌어졌다.
1987년 민주화의 피 흘림 이후 국가폭력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이는 다시는 물로는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신의 약속의 징표인 무지개처럼, 국가폭력에 대한 단호한 경고이자 이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국가와 민(民) 사이 약속의 상징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를 설립했으나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수상 강연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인권과 민주주의 사상의 뿌리가 아시아 역사적 사상, 맹자의 천명사상, 민본사상, 동학의 인내천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마음을 새기며,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사형제의 실질적 폐지를 이루었고, 대한민국을 인권 선진국으로 도약시키는 초석을 마련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의 부당하고 불법적인 권력 행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인권 침해를 바로잡는 중요한 보호 장치로 기능해왔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이 출범시킨 진실화해위원회는 과거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기관이었다.
민주화 이후, 이 기관들은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 악법을 철폐하고, 폭력에 물든 습성에서 회복하며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사회에 뿌리내리며 변혁적 정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12월 3일 계엄 이후, 내란 우두머리인 윤석열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위원장을 임명하며 진실화해위원회의 핵심가치를 훼손하여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는 계엄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헌법재판소의 적법절차를 방해하며, 피의자 윤석열의 불구속 수사를 권고하려고 시도했다.
민주주의의 옹호자들은 ‘평화로운 계엄’이라는 궤변과 이를 통해 사회의 갈등을 부추기려는 시도에 대해 신속하고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현행법상 내란 우두머리에 대한 최고형인 사형선고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하는지도 따지며 판단을 해야 한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와 절차를 수호하면서도, 이를 위협하는 극단주의 세력에 대해 민첩하고 단호하게 대응할 방안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
‘전투적 민주주의’를, 생명 외경과 화해의 마음을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가 직면한 과제는 파시즘의 발호 속에서 독일 사회가 고민했던 문제와 맥을 같이한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이 민주적 조직과 제도를 장악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활용하는 것을 제도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에서 어떻게 방어하고 예방할 것인가가 민주주의의 긴급한 과제이다. 정치학자 칼 뢰벤스타인은 ‘전투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원리를 일부 수정하는 법적 대응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 기본법상의 위헌정당해산제도와, 홀로코스트 부정 등 심각한 역사 왜곡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역사왜곡처벌법이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국가폭력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극우세력의 발호 속에서 내전적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대화와 포용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의 문제들도 있다. 단호함과 신속성, 민첩성에 기반한 결단과 전투적 민주주의의 전략까지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괴물과 싸우면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왜 그리고 어떻게 싸우는지,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지, 그리고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사형제 폐지 석상에서 강조했던 생명에 대한 외경과 화해의 마음을 품고 되새기며 인권과 민주주의의 제도와 문화를 튼튼히 할 때만이, 새로운 세상, 변혁적 정의로 나아갈 실낱같은 가능성이 열릴 것 같다.
■ 글쓴이 : 주 윤 정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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